1. 개요 #
발음은 [에-네로빅]이다. 국제 음성 기호로 [ænəˈɹoʊbik](에너로우빅)이다. [아나에어로빅], [언에어로빅] 은 없는 말이다. 모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면 바꿔서 부르자. ‘Bourbon’을 [버번], [부르봉], [부르본]으로 다양하게 부르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각각, 영어, 불어, 스페인어). 잘못된 발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나에어로빅], [언에어로빅]은 없는 말이다. 그나마 비슷한 발음이 스페인어이긴 한데, 스페인어로 ‘무산소’는 ‘Anaerobio’이며, 발음은 [아나에로비오]이다.
무산소 발효는 산소가 없는 무산소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미생물의 대사과정을 의미한다. 알코올과 젖산을 만들어내는 ‘발효’의 의미를 착안해보면, ‘발효’라는 단어 안에는 이미 ‘무산소 환경’이 전제되어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무산소 발효’는 의미가 중복된 표현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 ‘발효’는 미생물의 유기물 분해 과정 자체를 뜻하기도 하므로, 이 부분은 가볍게 넘어가도록 한다. 일반적으로 커피 발효는 공기 중에 노출된 상태에서 진행되는 데, 이러한 보편적인 가공과 차별화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드리면 되겠다.
2. 과정 #
최근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있는 무산소발효 커피들의 가공 과정은 제각각이다.
2.1 코스타리카의 무산소 발효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던 무산소 발효 커피는 (아마) ‘코스타리카 코르디예라 데 푸에고 무산소 발효(Costa Rica Cordillera de Fuego Anaerobic Fermentation)’ 커피였다. 해당 가공 연구에 참여했던 사람이 나와서 제작한 커피가 ‘코스타리카 엘 디아만테’이다. 시나몬(계피) 향미가 뚜렷하게 나오는 것으로 유명해졌으며, 호불호가 심하게 나뉘는 반응을 볼 수 있었다. 2019년 초에 있었던 KbRC(브루잉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챔피언이 사용한 커피이기도 하다. 가공 과정은 다음과 같다.
- ① 커피 체리의 과육을 제거한다
- ② 스테인리스 밀폐 용기에 담는다
- ③ 밀폐 용기에 과육(점액질)을 함께 넣는다
- ④ 이산화 탄소로 빈 공간을 채운다
- 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건조하여 마무리한다
커피 체리를 통째로 사용하지 않는다(①). 또한, 과육(점액질)을 함께 넣는데(③), 이 때 사용되는 과육이나 점액질은 다른 커피 체리의 것을 넣기도 한다. 쉽게 설명하면, A 커피를 가공할 때, 더 잘 익고 달콤한 B 커피 체리의 과육과 점액질을 넣는다는 것이다. 이산화탄소로 빈 공간을 채우는데(④), 이는 스테인리스 밀폐 용기에 남아있는 산소를 밖으로 밀어내기 위함이다. 일정 기간 동안 발효 과정을 거치면, 밀폐 용기에서 꺼내어 마무리를 한다. 마무리 할 때는(⑤), 물로 깨끗하게 씻어낸 다음 건조하기도 하고, 꺼내자마자 그대로 건조하기도 한다. 보통 전자를 무산소 워시드, 후자를 무산소 네추럴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 가공 방식은, 뒤에 이어 설명할 다른 무산소 발효와는 디테일한 측면이 다르다. 비교적 더 정교하다고 볼 수 있다. 무산소 발효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가공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 때 [시나몬 게이트]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다. 무산소 발효로 인하여 시나몬 향미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발효하는 과정에서 진짜 시나몬을 넣어서 함께 발효했다는 것이다. 가공 과정에 참여한 사람이 직접 이야기하기도 했으며, 이 외에도 독특한 향미를 만들어내는 무산소 발효 공법들이 실제로는 순수한 발효에 의한 향미가 아니라 특정 과일이나 향료를 넣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있었다.
2.2 그 외의 무산소 발효
나머지 “무산소 발효” 커피는 마케팅적인 측면이 강하다. “무산소 발효”라는 이름이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자, 너도 나도 해당 이름을 사용하기 위해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어거지로 만든 느낌이다. 대게 이런 커피들은, 그레인프로(Grain Pro)와 같은 비닐백에 체리를 통째로 담아 꽁꽁 묶어둔다. 산소를 차단했으니 “무산소 발효”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앞서 설명한 코스타리카 무산소 발효 커피와는 명확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 ① 커피 체리를 통째로 사용하거나, 또는 과육을 벗긴다
- ② 비닐백에 담는다
- ③ 꽁꽁 묶어 둔다
- ④ 일정기간이 지나면 건조하여 마무리한다
이러한 가공 방식이 갑자기 등장한 것도 아니다. 본래, 중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는 해당 가공을 ‘와인 프로세스’라고 부르기도 했고, 니라카과의 리몬시요(Limoncillo) 농장에서는 ‘펑키 내추럴 프로세스(Funky Natural Process)’라고 부른다. 무산소 발효를 했을 때 나타나는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무작정 따라만 하는 느낌이 강했다. 결과적으로는 과발효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 부정적인 향미를 가지는 경우들이 많았다. 코스타리카 무산소 발효 커피에서 느낄 수 있었던 향미들은 온데간데 없고, 과발효된 핵과, (나쁘게 말하면) 고추장과 같은 향미만 남아 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인 향미일 수 있지만, 애초에 무산소 발효의 목적은 ‘된장’이 아니다.
3. 무산소 발효 커피의 향미 #
정말 무산소 발효 커피는 독특한 향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커피에는 야생 효모(yeast)가 있어 효모를 추가하지 않아도 자연 발효를 한다. 효모들의 종류는 다양하고, 다양한 효모들은 다양한 발효 결과물들을 내놓는다.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향미들은 이러한 대사과정의 결과이다. 당연히 효모들의 서식환경이 달라지면, 대사과정이 달라지고,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향미를 내놓게 된다.
상큼한(톤이 높은) 산미보다는 톤이 낮은 산미들이 주로 나타난다. 일반적인 커피 발효 과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공기 중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호기성 미생물들의 대사가 활발하게 이뤄진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이야기한 아세트산과 시트르산 발효이다. 아세트산은 식초이며, 시트르산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감귤류 산을 의미한다. 이러한 산미들은 호기성 환경에서 주로 생성되므로, 대부분의 무산소 발효들에서는 해당 산미를 느끼기 어렵다. 또한, 발효 기간이 길어지면 ‘산’ 역시 분해될 수 있다. 이런 경우, 라이트 로스팅에서도 산미의 강도가 낮거나 톤이 낮은 불쾌한 신맛을 느낄 수 있다.
참고로, 무산소 발효라고 해서 반드시 대사과정이 느린 것은 아니다. 산화 발효(산소가 참여하는 호기성 발효)와 비교했을 때에는 발효 과정이 느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몇 주 이상 걸리는 긴 발효가 아니다. 발효 기간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온도와 pH이다.